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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식 동화] 검정고무신을 신은 제비꽃
작성자 : 중랑문학대학()   작성일 : 09.02.26   조회수 : 3135   첨부파일 :
(월간 선으로 가는 길 3회에 걸쳐 연재)

검정고무신을 신은 제비꽃

안재식(중랑문학대학 교수, 중랑문인협회 명예회장)

서쪽으로부터 구름장이 성큼성큼 잰걸음으로 다가왔습니다. 환한 대낮인데도 칠흑 같은 어둠을 불러왔습니다.
‘우르릉 쾅쾅!’
빗줄기가 사납게 할머니 산소를 내려쳤습니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 것처럼 시끄럽게 쏟아졌습니다.
‘좔좔좔, 촬촬촬.’
산소 옆의 작은 도랑은 흙탕물이 넘쳐흐르는 소리로 요란했습니다.
한참동안 퍼붓던 비가 멈췄습니다. 몰려왔던 구름장이 마음껏 심술을 부리고 물러났습니다. 동쪽으로 갈 힘이 떨어진 구름장은 군데군데 흰 비늘만 하늘에 뿌려놓고 사라졌습니다.
이윽고 해님이 방실거리며 나타났습니다. 온 세상은 언제 시끄러운 일이 있었느냐는 듯 태연하게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할머니 산소는 유독 햇볕이 잘 들었습니다. 그래서 온갖 생명들이 제집처럼 여기고 살았습니다.
봄이면 별처럼 태어나는 제비꽃도 할머니네 식구였습니다.
엄마 제비꽃은 누가 물어봐도 항상 봄이 제일 좋다고 하였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산소 잔디밭에 보랏빛 꽃을 피웠습니다.
항상 공손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엄마 제비꽃의 모습은 선녀 같았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살고 있는 엄마 제비꽃의 작은 몸은 그래서 더욱 작게 보였습니다.
엄마 제비꽃은, 다른 들꽃보다 작고 여린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들판에서 오래 살아가려면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눈에 띄게 예쁘거나, 향기가 진하면 틀림없이 누군가에게 몸이 꺾여 죽던지, 뿌리째 뽑혀 죽을 수 있기에 몸가짐을 무척 조심하였습니다.
그동안 엄마 제비꽃은 뜨거운 햇살에도 숙인 고개를 들어올리지 않은 채, 태어날 아기들을 기다리며 고달픔을 잊고 지냈습니다.
나뭇잎들이 물감으로 여린 색들을 진하게 물들이고 있는 한낮이었습니다. 이웃에 살고 있던 강아지풀이 엄마 제비꽃을 내려다보며 말을 건넸습니다.
“어머! 봄이 왔다고 서둘러 싹을 틔우더니, 아직 내 허리만큼도 자라지를 못했잖아!”
강아지풀은 고개를 빼는 운동을 부지런히 했기 때문인지, 엄마 제비꽃을 보려면 고개를 깊이 숙여야 할 정도로 키가 커버렸습니다.
키 작은 동생을 나무라듯 으스대는 강아지풀이 얄미웠지만, 엄마 제비꽃은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넌 키가 많이 커서 좋겠구나. 난 만날 고개를 숙이고 살아서 네가 이렇게 키 크는 줄도 모르고 있었어. 초봄에 싹을 틔우던 모습만 생각하고 있었지 뭐야.”
엄마 제비꽃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지 않고, 강아지풀의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며 칭찬했습니다.
“제비꽃아, 네 다리는 숨겨두었니? 머리만 보이네. 꼭 난쟁이 같아!”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서 강아지풀의 줄기를 흔들어주었습니다. 강아지풀은 더욱 우쭐거리며, 엄마 제비꽃을 놀려댔습니다.
그래도 엄마 제비꽃은 묵묵히 참았습니다. 강아지풀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들꽃들이 무시를 하고 놀려도 늘 참았습니다. 왜냐하면, 엄마 제비꽃에게 아기씨주머니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씨주머니에는 아기씨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좁디좁은 씨주머니 안은 찜통 같았습니다. 아기씨들이 서로 덥다고 비키라며 싸우기 일쑤였습니다.
그럴 때면 엄마 제비꽃이 씨주머니를 조금 열어주었습니다. 산들바람이 살랑거리며 살짝 들어오면, 아기씨들은 한결 시원하다고 좋아하였습니다.
엄마 제비꽃은 아기씨들이 바람에 날리지나 않을까, 빗물에 떨어져 흘러내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하루하루 고단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자연히 몸에 살도 부쩍 빠졌습니다.
그러나 아기씨들은 햇볕에 몸을 구릿빛으로 그을리며 튼튼하게 자랐습니다.
아기씨들이 바깥세상으로 나가 살아야 할 날이 점점 다가왔습니다.
엄마 제비꽃은 아기씨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육시켰습니다.
아기씨들은 좁은 씨주머니보다 넓은 세상에서 살 수 있다는 호기심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자다가 꿈속에서 깜짝깜짝 놀라 깨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구어진 해님은 펄펄 힘이 솟는지, 한나절을 엄마 제비꽃 머리꼭지에서 머물고 가는 날이 점점 더 길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검정고무신을 신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저만치 보였습니다.
할아버지 몸은 나비가 팔랑거리듯 가벼워 보였습니다. 굽은 허리를 한 번 폈다가 다시 걷기를 거듭하였습니다.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왼손에는 호미를 들고, 힘들게 힘들게 할머니 산소로 올라왔습니다.
할머니 산소를 자주 찾던 할아버지였습니다. 날씨가 무더워서인지 요즈음 발길이 뜸했는데, 오늘 찾아왔습니다.
재작년 겨울, 할아버지가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치매를 앓던 할머니가 마을 어귀로 나섰다가 뺑소니 트럭에 치여 돌아가신 후 이곳에 묻혔습니다.
할아버지는,‘모두가 내 탓이야!’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였습니다.
할아버지에게는 아들딸 둘이 있었습니다.
아들딸은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도 치매를 심하게 앓고 있는 할머니를‘나 몰라라.’하며 연락을 끊고 찾아오질 않았습니다.
병든 할머니를 간호하면서 할아버지는,‘할멈과 같은 날, 같이 눈을 감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가 먼저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슬픔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오늘따라 할 말이 많은지, 봉분에 파랗게 돋아 있는 잔디를 소중하게 쓰다듬었습니다.
“할멈, 나 왔소. 나만 남겨두고 흙에 누워 있으니 편하오? 할멈 없이 사는 집엔 먼지만 들락거린다오. 에~휴.”
“…….”
“어젯밤엔 눈을 뜬 채로 꼬박 밤을 새웠지. 통 잠이 오질 않아요. 오늘은 아무것도 입에 넣고 싶지가 않고…. 개미도 찾아오지 않는 방구석에 자식이라고 찾아오겠소?”
“…….”
“할멈, 내 다리에 힘도 이젠 빠져 나가려는가 봐. 그래서 오늘은 지팡이를 짚고 왔소. 오는 동안에 힘을 주워다가 다리에 넣었지 뭐야. 그랬더니 이나마 온 것 같아. 허허허.”
할아버지는 생전에 할머니를 대하듯 웃기도 하고, 심술을 부리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가끔씩 서글픈 눈빛을 한참동안 하늘에 두곤 하였습니다.
엄마 제비꽃은 귀를 쫑긋 세우고 할아버지의 하소연을 모두 귀담았습니다. 이제 할아버지의 사정을 낱낱이 알게 되었습니다. 자식들에게 봉양을 받지 못하고,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혼자 남게 된 할아버지가 무척이나 불쌍하였습니다.
엄마 제비꽃의 몸은 아기씨들을 키우느라 꼬챙이처럼 말랐습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할아버지가 반갑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여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할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왼손에 쥐고 있던 호미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순간, 엄마 제비꽃은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급하게 아기씨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떠날 때가 왔구나. 할아버지가 산소를 손질하려고 오셨나 보다. 저 호미를 봐! 틀림없이 날 뿌리째 뽑으려고 하실 거야. 엄마가 뽑힐 때, 너희들은 몸을 던져 씨주머니 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 알았지?”
엄마 제비꽃이 떨리는 목소리로 아기씨들에게 당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기씨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하였습니다.
“엄마! 무서워요. 엄마는 저 할아버지가 불쌍한 분이니까 예쁜 꽃을 피워서 할머니 대신 위로해 드리라고 했잖아요. 그런 할아버진데 왜, 엄마를 뿌리째 뽑아버려요?”
“사람들은 잔디밭에 다른 들꽃이 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잔디가 자라지 못하고 죽는다면서 잡풀들을 뿌리째 뽑아 씨를 말리려고 해. 특히 산소에는 잔디만 잘 크라고 더욱 심하게 그래.”
“에잇! 사람들은 나빠요! 잔디만 제일인가?”
아기씨들은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엄마 제비꽃은 함께 불평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얘들아, 절대 겁내지 말고, 엄마가 하는 말 정신 차려 들엇!”
“예! 엄마.”
“할아버지가 엄마를 붙잡았을 때, 엄마가 씨주머니를 활짝 열어줄 테니 높이 뛰어올라 힘껏 날아가야 해! 넝쿨이 자라는 숲이나 키가 큰 나무 밑으로는 가지 말고……. 되도록 여기 산소 주변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사이좋게 살아야 한다. 모두 알아들었지?”
“엄마, 같이 가면 안 돼요?”
“엄마는 같이 갈 수가 없단다. 어쨌든 너희들은 최대한 몸을 굴려서 키 작은 잔디들이 사는 곳으로 가야만 안전해. 그리고 절대로, 절대로 새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숨기고 있어야 한다!”
“왜요? 새들이 어때서요?”
“이런, 쯧쯧! 새들의 먹이가 될까 봐 그러는 거야.”
“아휴, 무서워! 그런데 엄마는 어디로 가요?”
“엄마는 말이다, 아주 좋은 곳에서 너희들이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도하고 있을 거야.”
“엄마를 부르면 대답할 거죠?”
“엄마도……, 엄마가 대답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제비꽃 가족은 바쁘게 이별을 준비하였습니다. 강아지풀은 그런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면서 쫑알댔습니다.
“후후후, 쪼그만 것들이 호들갑 떠네. 저렇게 힘없는 노인이 어떻게 뿌리를 뽑는다는 거야? 뽑다가 쓰러지고 말걸.”
강아지풀이 춤을 추듯 커다란 키를 바람 부는 대로 흔들거렸습니다. 힘이 넘쳐나는 걸 자랑하듯 너울댔습니다.
엄마 제비꽃이 보다 못해 강아지풀에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춤을 추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할아버지가 호미를 가지고 오신 이유를 몰라서 그래? 여기 잔디밭에 잡풀을 없애려고 오신 거야! 뿌리가 뽑히더라도 어떻게든 살기 위해 준비를 하란 말이야.”
그 말에 강아지풀은 기분이 나빠져서 비아냥거렸습니다.
“넌 고렇게 작은 키로 세상을 얼마만큼 보았다고 아는 척하는 거니? 적어도 나처럼 키가 커야 많이 보고, 많이 아는 거란 말이야. 알아들었어!”
“큰 키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야. 그걸 너도 곧 깨닫게 될 거야.”
엄마 제비꽃이 진심어린 충고를 하였습니다.
강아지풀은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 제비꽃의 머리 위를 왔다 갔다 하면서 키재기 흉내를 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할아버지의 중얼거림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할멈, 오늘이 할멈을 보러오는 것도 마지막인 것 같소. 내 몸속에 병이 들었대요. 수술하러 내일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야 한대요. 할멈, 내가 보고 싶으면 서울로 오시게. 두세 시간 기차 타면 도착한다고 하니까……. 못 찾겠으면 전화하고, 허허허.”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봉분에 기댄 할아버지의 눈에 물기가 젖었습니다.
한참동안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잔디밭에 호미질을 시작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키가 큰 강아지풀부터 뽑았습니다.
강아지풀은 엄마 제비꽃을 내려다보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뽑힌 뿌리가 파르르 떨었습니다. 강아지 꼬리처럼 흔들대며 우쭐거렸던 걸 후회라도 하는 듯 보였습니다.
엄마 제비꽃은 강아지풀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눈을 꽉 감았습니다. 힘을 준 몸에 할아버지의 손이 닿았습니다.
땅속 깊숙이 박아놓은 뿌리들이 뚝뚝 소리를 내면서 끊어졌습니다. 엄마 제비꽃의 몸이 할아버지 손 위로 솟아올랐습니다.
공중으로 솟구친 엄마 제비꽃은, 아프다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아기씨주머니를 활짝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힘껏 비틀면서 흔들었습니다.
아기씨들이 여기저기로 튀기 시작했습니다. 서러운 이별이었지만 엄마 제비꽃과 아기씨들은 고통의 순간을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막내 아기씨가 할아버지 고무신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할아버지 고무신 속에는 흙이 들어와 있었고, 개미도 들락거렸습니다.
막내 아기씨는 냄새나는 고무신에서 빠져 나가려고 높이뛰기를 해보았지만, 할아버지 발 때문에 움직이지를 못했습니다.
개미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막내 아기씨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울고 싶었지만 소리 내어 울 수도 없었습니다. 뿌리째 뽑힌 엄마 제비꽃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진 씨주머니 형제들도 모두 잘 피했는지 걱정되었습니다.
“엄마!”
살짝 엄마를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엄마 대신 형제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막내야, 나는 첫째야. 잔디밭에 잘 도착했는데, 너는 어디에 있니?”
역시 소곤거리듯 작은 목소리였습니다.
“언니도 잘 도착했구나. 나는 셋째야. 햇볕 잘 드는 곳에 있어. 안심해!”
여기저기 잘 도착했다고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막내 아기씨도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언니, 난 냄새나는 할아버지 검정고무신 속에 들어와 있어.”
“뭐! 검정고무신 속에 막내가?”
“으응, 고무신 속에……. 여기는 개미도 들락거리고, 지독한 냄새도 나고, 도망가려고 해도 틈이 없어.”
“막내야, 침착하게 있다가 할아버지가 고무신을 벗을 때 얼른 나와.”
“알았어!”
그때 고무신 속의 발가락이 곰지락거렸습니다. 일을 마친 할아버지가 집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자, 할아버지 발가락들이 막내 아기씨의 몸을 꽉꽉 눌렀습니다.
“언니! 숨 막혀 죽을 것만 같아. 날 구해줘!”
“막내야! 절대로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해! 꼭 살아서 돌아와야 해!”
막내 아기씨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 소리칠 수도 없었습니다. 이젠 언니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막내 아기씨는 신발 속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자꾸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아기씨야! 어서 정신 차려. 엄마가 걱정하고 있단다.”
누군가 흔드는 소리에 막내 아기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밤하늘에 달님이 고무신 속으로 들어와 막내 아기씨를 깨우고 있었습니다.
“달님, 뭐라고요? 엄마가 걱정하고 있다고요? 지금 살아 있나요?”
“엄마는 뿌리째 뽑혀 더 이상 너와 만날 수는 없단다. 하지만 할머니 산소 옆에 편안하게 잠들어 있어.”
“달님, 제발 냄새나는 고무신에서 나를 꺼내 주세요.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아기씨야, 난 너에게 달빛을 뿌려줄 수는 있어도 너를 꺼내 줄 만한 힘이 없단다.”
“그럼 난 나쁜 할아버지, 냄새나는 신발 속에서 평생 살아야 해요?”
막내 아기씨는 할아버지가 밉고 원망스러웠습니다. 엄마와 형제들이 보고 싶어 밤새도록 울음을 그치지 못했습니다.
하늘이 흐릿하게 밝아올 때쯤에야 막내 아기씨는 지쳐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웅성웅성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눈을 비비고 올려다보니, 할아버지가 젊은 남자 등에 업혀 사립문을 나서고 있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할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밤에는 달님과 별님이 막내 아기씨와 놀아주고, 낮에는 해님과 빗방울, 구름과 바람이 번갈아가며 찾아왔습니다.
막내 아기씨는 구름과 바람을 제일 많이 기다렸습니다. 구름에게는 아주 센바람이 찾아오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바람에게는 힘껏 불어달라고 했습니다.
어떻게든 바람의 힘을 빌려서라도 신발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센바람에도 검정고무신은 할아버지의 오래된 냄새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뭇잎들이 마당을 가득 채우고, 발갛게 익은 홍시가 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져 터졌습니다.
마당가 감나무에 죽치고 앉은 까치가 주인인 것처럼 홍시를 쪼아 먹어도 할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뜨겁던 해님도 눈길이 미끄러운지, 차가운 몸으로 가끔 다녀가곤 했습니다.
막내 아기씨는, 고무신 탈출을 돕겠다며 눈치 없이 찾아오는 바람 때문에 고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바짝 마른 몸으로 아기씨들을 비바람 속에서 지켜내던 엄마 제비꽃의 포근한 사랑이 그리웠습니다. 그리움에 아프고, 외로움에 울다가, 하염없는 기다림에 지쳐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막내 아기씨는 고무신 속의 흙들을 이불삼아 몸을 꼭꼭 감추고,“엄마!”를 불러보았습니다.
그러자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막내야, 엄마다. 많이 컸구나. 언젠가는 우리 막내도 어른이 될 거야. 봄이 오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건강하게 커야 한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막내야, 절대로 할아버지를 미워하지 말거라. 할아버진 참으로 불쌍한 분이란다. 미워하기보다는 예쁘게 꽃을 피워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렴. 그래야만 할머니 산소 잔디밭에 있는 형제가 모두 다치지 않고 살 수가 있단다.”
엄마 제비꽃의 목소리는 은은하면서도 엄숙하였습니다.
“엄마, 엄마! 어디 있어요?”
막내 아기씨는 엄마 제비꽃을 부리나케 찾았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엄마 제비꽃의 자상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엄마를 찾다가 지친 막내 아기씨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엄마 제비꽃의 당부처럼 할아버지를 미워했던 마음을 겨울바람에 날려 보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자 얼음장처럼 차갑던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편안하였습니다.
“아기씨야, 저 너머에는 아지랑이가 아롱아롱 피고 있단다. 너도 꽃을 피우려면 준비를 해야지.”
해님이 엄마 품처럼 따뜻하게 안아주면서 말했습니다.
“해님이 포근하게 안아주니까, 자꾸 몸이 근질근질해요. 날개가 나올 것 같아요.”
“그래? 너도 싹틔울 준비가 되었나 보구나. 내가 빗방울에게 부탁해서 물방울을 넣어줄게.”
“그러지 않아도 돼요. 며칠 전에 해님이 따뜻하게 고드름을 안아주니까, 고드름이 눈물을 흘렸잖아요. 그때 싹틔우는 데 쓰라고 눈물방울을 몇 방울 주고 갔어요.”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도 엄마 말씀대로 힘을 내서 꽃을 피워야겠어요. 그래야만 형제들이 있는 산소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해님은 막내 아기씨의 어른스러움에 뿌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막내 아기씨는 고드름 눈물방울에 몸을 담그고, 따스한 해님 품에 포옥 안기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막내 아기씨에게 몸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찾아왔습니다. 몸속에서 작은 뿌리들이 돋아나고, 벌어진 틈으로 뾰족하게 싹이 올라왔습니다.
어른이 되어가는 막내 아기씨는 어린 싹을 보살피느라 아픔도 잊고 지냈습니다.
해님도 바쁘게 고무신 속을 들락거렸고, 바람도 빗방울도 안절부절 왔다갔다 하였습니다.
양이 적은 흙 때문에 막내 아기씨는 몸이 비뚤하게 굽었습니다.
그러나 해님과 빗방울의 정성어린 도움으로 엄마 제비꽃과 똑같은 보랏빛 제비꽃 봉오리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향기가 진한 꽃들이 벌과 나비를 깨우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굳게 잠겨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사립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습니다.
막내 제비꽃이 놀라 목을 길게 뽑고 사립문을 바라보았습니다.
‘아하!’
할아버지가 사립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뒤를 이어 할아버지 아들도 따라 들어왔습니다.
할아버지는 고무신이 있는 댓돌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고무신 속에서 피어난 제비꽃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내 검정고무신에 제비꽃이 생명을 예쁘게 풀었구나. 작은 몸에 큰 고무신을 신고 있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정말! 제비꽃이 봉오리를 올렸어요. 아버지가 힘든 수술을 견디고 살아나신 것처럼 제비꽃도 힘들게 꽃을 피웠네요. 아마도 제비꽃이 아버지가 살아오시길 기다렸나 봐요.”
“그런 것 같구나. 내가 마지막으로 이 고무신을 신었던 날이 언제더라?”
“어머님 산소에 갔다 오신 다음날 병원에 입원하셨잖아요.”
“오호라, 그렇구먼. 산소에 있던 제비꽃씨가 고무신을 신고 나를 따라왔구나. 이 제비꽃이 내가 수술 받는 동안 내내 기다리고 있었나 보네.”
“아버지 말씀을 듣고 보니, 어머님이 제비꽃으로 둔갑하여 홀로 집을 지키면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계셨나 봐요.”
“쯧쯧, 홀로 여린 몸으로 긴긴 시간 얼마나 무섭고 추웠을까.”
“아버지 퇴원을 축하라도 하듯 어머니가 보라색 꽃봉오리를 올리고 기다리고 계셨어요. 하하하.”
“녀석, 설마 제비꽃이 네 어미일라고. 하여간 이 제비꽃을 산소로 옮겨 심어야겠다.”
할아버지는 제비꽃을 측은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아버지, 철없던 저를 용서해 주세요. 어머님을 제가 모셨더라면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을……. 흑흑.”
아들이 할아버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니다, 너희들 탓이 아니야. 편히 쉬고 싶어서 먼저 떠났을 게야.”
할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습니다.
“제가 어머님 산소에 제비꽃을 심어놓고 오겠습니다. 아버지는 집에서 쉬고 계세요.”
“아니다, 나도 가야겠어. 제비꽃을 심게 호미를 내오렴. 그리고 내가 없더라도 제비꽃을 잘 보살펴줘라.”
“예, 아버지.”
할아버지는 아들이 호미를 찾는 동안 제비꽃이 핀 검정고무신을 들어올렸습니다. 소중히 가슴에 꼭 안았습니다.
호미를 찾아온 아들은 할아버지 손을 살며시 잡았습니다. 아들의 두 눈에는, 할아버지를 불쌍하게 여기던 엄마 제비꽃의 눈빛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엄마 제비꽃이 살던 곳, 형제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게 된 막내 제비꽃은 기쁨이 넘쳐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막내 제비꽃은 할아버지의 느린 발걸음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기를 바랐습니다. 엄마 제비꽃이 그랬던 것처럼 차분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엄마 제비꽃을 닮은 단정한 모습이 무척이나 곱고 예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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